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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700 호 [편집장의 시선] 혐오로 물든 사회, 이제는 그 연결고리를 끊어야 할 때

  • 작성일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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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5597
윤소영

  혐오표현은 마치 수채화 물감이 종이를 물들이듯 우리 삶을 물들이고 있다. 물들인다는 표현이 의아할 수도 있지만, 우리 일상 속 혐오표현을 살펴본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한 번쯤 혜지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혜지는 게임을 하는 여성 유저를 비하하는 혐오 표현이다. 사실 혜지는 한 여성 게임 유저의 이름으로, 혜지라는 유저가 다른 유저에게 의존해 게임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고 이 일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퍼지며 어느덧 혜지는 게임을 못하는 여성 유저를 뜻하는 혐오표현으로 변질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혐오가 번져 혜지는 여성 유저 자체를 비난하는 혐오표현으로 심화되었다. 게임을 못하는 유저에 대한 혐오가 게임을 못하는 여성 유저에 대한 혐오로, 더 나아가 게임을 하는 여성 유저 전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 것이다. 게임을 못하는 유저에 대한 지나친 비난 역시 결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심지어 혜지라는 혐오표현이 생겨난 이후로는 이유도 목적도 없이 혐오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처럼 혐오표현은 사람들의 의식을 불선하게 변화시킨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혜지라는 단어는 새로운 혐오표현을 파생했다. 잼민이라는 단어가 바로 혜지와 비슷한 양상으로 생겨난 혐오표현이다. 사람들은 한 번 특정인의 이름을 딴 혐오표현을 만들어내자 너무나도 쉽게 같은 방법으로 다른 혐오표현을 만들어냈다. 게임을 하는 초등학생 유저를 비하하는 혐오표현으로 시작된 잼민은 역시 혐오가 번져 어느덧 초등학생 전체를 비하하는 혐오표현으로 고착되었다. 실제로 잼민은 생겨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등학생을 비하하는 혐오표현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당사자인 초등학생 역시 서로를 비난하고 비하하기 위해 잼민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재미있는 어감, 잼민이라고 친구를 놀렸을 때의 반응, 다른 아이들이 사용하니까 유행에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등을 이유로 이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설마 친구를 진심으로 혐오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혐오를 함축하고 있는 잼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너무나 쉽게 비난하고 비하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혐오표현은 결코 온라인 게임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미 너무 많은 혐오표현이 수도 없이 생겨나고, 끝도 없이 번져나간다. 그 일례로 특정 연예인을 비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뇌충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혐오표현 역시 의미를 확장하더니 어느덧 생각이 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혐오표현에 이르렀다. 이 단어를 시작으로 특정 단어 뒤에 ‘벌레 충’이라는 한자를 붙여 새로운 혐오표현들이 파생되었다. 10대 청소년을 비하하는 급식충, 매사에 진지한 사람을 비하하는 진지충 역시 그 예다. 이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특정 대상이나 특정 행동에 불만이 생긴다면, 충이라는 접사를 붙여 너무나 쉽게 새로운 혐오표현을 만들어낸다.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혐오표현을 만드는 알고리즘까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더 이상 죄책감이나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 혐오표현의 사용을 지적하는 사람은 되레 예민하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혐오표현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집단 간 갈등을 조장하고 심화시키고 있다. 된장녀는 경제활동 없이 부모나 남자게게 의존해 사치를 부리는 여성을 비하하는 혐오표현이다. 이 혐오표현은 2006년 ‘와우코리아’의 신조어·유행어 설문조사에서 사용 부문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만연하게 사용되었던 단어다. 이 단어는 점차 그 단어를 확장하더니 어느덧 여성 자체에 대한 혐오를 내포한 단어가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사람들은 남성에 대한 혐오를 내포한 한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된장녀에 대응해서 된장남이라는 단어를 쓰던 것이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점차 변화를 겪었고, 어느덧 한남이라는 단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젠더 갈등의 원인이 혐오표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혐오표현들은 서로에 대한 더 많은 혐오를 이끌어내면서 젠더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언어가 가진 힘은 크고, 혐오표현의 힘 역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 혐오표현의 힘은 빠르게 확산되고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혐오가 낳는 혐오의 연결고리 위에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처음에는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장난처럼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혐오에 익숙해지면 어느덧 우리는 그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를 진심으로 혐오하게 될 것이다. 이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소통하지 않을 것이다. 단절된 사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혐오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할 때이다. 혐오와 갈등을 단기간에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만, 혐오표현을 끊어내는 것은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쓴다면 가능한 일이다. 의식적으로 언어습관을 개선하여 무분별한 혐오표현 대신, 나와 타인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말을 쓰는 것은 어떨까. 우리 한 사람의 언어습관 개선은 반대로 우리 사회를 다시 아름다운 언어로 물들일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윤소영 기자